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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JSA] 후기, 흑백 사진과 아버지의 뒷모습

by cow85 2026. 8. 23.

JSA 영화 공식 포스터

[서론] 흑백 사진 한 장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게 열다섯 살 중학교 3학년 명절 연휴, 어둑해진 거실에서 부모님과 나란히 앉아 보던 TV 특선영화였다. 극장 스크린이 아니라 낡은 브라운관 TV 화면이었는데도, 네 명의 청춘이 멈춰 서 있는 그 시린 흑백의 잔상은 어린 내 숨통을 그대로 틀어쥐었다.

 

[본론] 1. JSA 첫 관람, 명절 거실과 TV 특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야기는 초등학생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하면서도 비극적이다. 우리나라와 북한이 총을 겨누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어느 날 밤 북한군 초소에 총격 사건이 터지며 북한 군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중립국 수사관이 찾아와 대체 왜 이런 비극이 벌어졌는지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나가는데, 그 살벌한 총격전의 이면에는 남한 군인과 북한 군인이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서로 형, 동생 하며 나눈 눈물겨운 우정이 숨어 있었다. 명절 연휴 거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이 영화를 마주했을 때, 나는 숨 막히는 긴장감에 넋을 완전히 놓고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군사분계선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서슬 퍼런 선을 몰래 넘나들며, 어두컴컴한 북한 초소 안에 넷이 둘러앉아 초코파이를 나눠 먹고 닭싸움을 하며 낄낄거리던 그 짧고 따뜻했던 밤들은 너무나 눈부셨다. 남과 북이라는 거대한 이념과 철조망을 다 걷어내고 나면 그저 실없는 농담에 웃고 정을 나누는 평범한 청춘들일 뿐인데, 그 순수한 우정이 깊어질수록 내 가슴속에서는 언제 저 평화가 산산조각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2. 마지막 흑백 사진, 가슴이 쿵 내려앉은 순간

 

결국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과 함께 터져 나온 공포는, 가장 다정했던 친구들을 향해 서로 총구를 겨누게 만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비극의 총성이 멎고 모든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뒤, 영화의 마지막 순간 흑백 사진 한 장이 화면을 채울 때 내 가슴 한구석은 다시 한번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사진은 비극이 일어나기 전, 판문점을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의 카메라에 남북의 네 병사가 우연히 한 프레임에 잡힌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구 하나 총을 겨누지도, 피를 흘리지도 않은 채 각자 딴청을 피우거나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모습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청춘들의 가장 찬란했던 시간이 영원히 흑백으로 박제된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마지막 흑백 사진이 멈추고 엔딩 크레딧의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올 때까지, 거실에 모여 앉아 있던 우리 가족 모두는 한동안 불 켜진 방 안에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멍하니 TV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3. '참… 세상이 모질다' — 아버지 뒷모습

 

그 무겁고 먹먹한 침묵을 깬 것은 늘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없으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조용히 리모컨을 들어 TV 전원을 툭 끄시더니, 깊은 한숨을 바닥으로 푹 꺼뜨리며 "참… 세상이 모질다" 하고 나직하게 읊조리셨다. 그러고는 쓸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베란다로 담배 한 대를 피우러 나가셨다. 열다섯 살 소년의 눈에는 영화 속 총격전의 피 흘리는 결말보다, 담배 연기를 내뿜던 아버지의 그 굽은 뒷모습과 짧은 탄식이 훨씬 더 깊고 서늘하게 박혔다. 그 당시 내 눈에는 그저 '친하게 지내던 군인 형들이 피치 못할 오해와 공포 때문에 안타깝게 죽었구나' 정도의 슬픔이었다. 이념이나 체제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온전히 실감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단단해 보이던 아버지가 뱉어낸 그 씁쓸한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이건 그저 지어낸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들이 온몸으로 버텨내고 있는 진짜 무섭고 모진 세상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가슴에 확 와닿았다. 아버지가 육군 복무는 아니셨기에 그 시절 군대 이야기를 시시콜콜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훗날 내가 나이를 먹고 군대를 겪어보니 그 엄혹한 시대를 살아낸 아버지의 가슴에는 '나였어도 저 비극 앞에서 별수 없었겠구나' 하는 뼈아픈 공감이 스쳤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용을 다 알면서도 TV 채널을 돌리다 JSA가 걸려 있으면 중간부터라도 홀린 듯 끝까지 봤다. 대여섯 번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명작 군대 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아버리는 잔인한 현실의 벽과 그 벽을 마주하며 깊은 한숨을 쉬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평생 잊지 못하게 만드는 시린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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