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내 통장에 1,420원이 찍혔습니다. 월급날까지 닷새나 남았는데 당장 지갑에도 먼지만 굴러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현금자동입출금기 화면에 뜬 1,420원이라는 숫자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소 출금 단위인 만 원 한 장도 손에 쥘 수 없는 잔고였으니까요. 그 붉은색 잔액 표시를 보며 서 있던 은행 코너 안이 한겨울 칼바람 부는 길바닥보다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현장 바닥에서 칩 치우고 절삭유 냄새 맡아가며 기계 돌리다 돌아왔는데, 씻기도 전에 뱃속에서 헛구역질 같은 꼬르륵 소리가 올라왔습니다. 싱크대를 뒤져봐도 마른 멸치 대가리 하나 안 보였습니다. 신발도 제대로 안 벗고 멍하니 장판에 주저앉아 주머니를 털어보니 100원짜리 몇 개와 50원짜리 찌꺼기 동전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낡은 브라운관 TV에서 우연히 틀어둔 영화가 바로 '티끌모아 로맨스'였습니다. 화면 속에서 송중기가 연기한 지웅이라는 녀석이 50원이 모자라 콘돔 하나도 못 사고 편의점에서 쩔쩔매더군요. 집주인한테 보증금 다 털리고 쫓겨나 옥상에 텐트를 치는 꼴을 보는데,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건 영화 속 코미디 연기가 아니라, 당장 내 방구석 바닥에 고여 있는 냄새나는 내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티끌모아 로맨스와 1,420원
영화에서 한예슬이 맡은 홍실은 닥치는 대로 폐지를 줍고 헌책을 팔며 은행 적금 2억을 목표로 달립니다. 반면에 지웅은 청년 백수로 허세를 부리다가 잔고 바닥을 치고 길바닥으로 나앉지요. 지웅의 그 찌질한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아서 화면을 똑바로 보기가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 저 역시 컵라면 하나를 사 먹으려고 주머니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을 세어 올리며 자존심이 잔뜩 구겨지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구멍 난 주머니 구석까지 손가락으로 긁어모아서 나온 돈이 고작 몇백 원이었습니다. 편의점 매대에 850원짜리 육개장 사발면을 올려놓고, 백 원짜리 8개와 십 원짜리 동전들을 카운터 위에 하나씩 줄 세워 놓았습니다. 알바생은 아무 생각 없이 바코드를 찍고 동전을 긁어모았지만, 제 얼굴은 화끈거려서 터질 것 같았습니다. 마치 내 가난과 무능을 온 동네에 확성기로 떠벌리는 기분이 들더군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부러 무표정하게 덤덤한 얼굴로 뜨거운 물을 받았습니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문득 통장 잔고 1,420원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습니다. 월급날까지 남은 닷새를 이 컵라면 하나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만 원이 안 되면 돈 백 원도 내어주지 않는 그 망할 ATM 기계 앞에서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지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그 눅눅하고 비참한 기분은 뱃속에 들어간 라면 국물로도 도무지 씻겨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화면 속 지웅이 홍실을 따라다니며 몇천 원짜리 알바를 뛰는 걸 보면서, 저건 만화 같은 설정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름 묻은 작업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밤길을 걸어오는데 바람이 유난히 시렸습니다.
믹스커피 설탕물과 열네 시간 수면
돈이 완전히 바닥난 그 주말 이틀은 공장 탕비실에서 몰래 챙겨온 믹스커피로 버텨냈습니다. 금요일 잔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눈치를 보다가 정수기 옆에 수북이 쌓여 있던 노란색 믹스커피 대여섯 개를 작업복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습니다. 훔친다는 죄책감보다 주말 동안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 앞섰습니다. 찬물에 대충 저어서 타 마신 믹스커피의 그 들척지근한 설탕물은 위장을 달래주기는커녕 속만 더 쓰리게 만들었습니다. 배고픔을 잊는 방법은 잠을 자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보일러도 제대로 안 돌아가는 냉골 방에서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열네 시간 동안 시체처럼 잤습니다. 몸을 움직이면 에너지가 소모되고, 에너지가 닳으면 뱃속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니 억지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도망치는 식이었습니다. 자다 깨서 시계를 보면 서너 시간밖에 안 지나 있었고,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며 허기를 껐습니다. 영화에서 홍실이가 10원 한 장 아끼려고 온갖 짓을 다 하는 걸 두고 사람들은 독하다고 수군거리겠지만, 저는 그 심정이 뼛속까지 이해가 갔습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이렇게 짐승처럼 누워서 잠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니까요. 마침내 돌아온 월급날, 통장에 찍힌 기본급 몇 푼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동네 편의점이었습니다. 매대에서 제일 푸짐해 보이는 3천 원짜리 도시락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습니다. 카드를 내미는데, 계산 단말기에 카드가 꽂히고 결제 승인 소리가 날 때까지 제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혹시라도 잔액 부족이 뜨거나 카드 에러가 날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던 겁니다. '삑' 소리와 함께 영수증이 나오는 순간에야 겨우 참았던 숨을 토해냈습니다. 찌개 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인 그 3천 원짜리 도시락 뚜껑을 편의점 간이 의자에 앉아 뜯는데, 밥알을 씹으면서 목구멍이 턱 막혀왔습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락 다음 날, 세 가지를 바꿨다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난 다음 날 아침, 거울을 보고 세 가지를 내 생활에서 완전히 뜯어고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첫 번째는 월급 통장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당일, 무조건 급여의 50%를 적금 통장으로 강제 자동이체 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 중에서 방세와 공과금을 제하고, 하루에 딱 만 원만 쓸 수 있도록 체크카드에 쪼개서 넣었습니다. 지웅이처럼 대책 없이 긁고 다니다가 통장 잔고 1,420원을 마주하는 지옥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공장 형들과의 술자리를 칼같이 끊어낸 일이었습니다. 퇴근길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며 부르는 손길을 뿌리치고 "저 돈 모아야 해서 이제 술자리 못 갑니다"라고 대놓고 선언했습니다. 짠돌이라고 손가락질받고 분위기 깬다고 욕을 먹는 쪽팔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저한테는 남들한테 없어 보이는 쪽팔림보다, 주말에 먹을 게 없어서 방구석에 누워 굶는 공포가 백 배는 더 무서웠습니다. 세 번째는 내 기술을 올려서 내 몸값을 비싸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현장 바닥에서 칩 통이나 비우고 기름걸레질만 해선 평생 이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베테랑 사수 옆에 딱 달라붙어서, 그 사람이 도면 보고 수동 가공하는 법과 머시닝센터 G코드 짜는 걸 눈으로 훔쳤습니다. 작은 손바닥만 한 수첩을 기름투성이 작업복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며 공구 회전수, 이송 속도, 좌표계 잡는 방식을 죄다 적었습니다. 남들 담배 피우러 나갈 때 사수가 짜놓은 CAM 프로그램을 모니터로 열어보며 공구 경로를 외웠습니다. 밤마다 기계 앞에서 씨름하며 공차 100분의 1밀리미터를 맞추려고 매달렸더니, 몇 달 지나지 않아 제 손을 거친 제품은 불량이 안 난다는 소문이 공장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이 악물고 버틴 지 딱 1년이 되던 날, 만기가 된 적금을 들고 은행 ATM기 앞에 다시 섰습니다. 화면을 터치하고 조회를 누르자 숫자가 떴습니다. 1, 000, 000원. 1천만 원. 화면에 찍힌 동그라미 일곱 개를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짚어가며 하나, 둘, 셋, 넷 천천히 세어보았습니다. 1년 전 1,420원 앞에서 얼어붙어 있던 내 손가락이, 이제는 1천만 원이라는 숫자 위를 떨리는 손으로 짚고 있었습니다. 남들에게는 작은 종잣돈일지 몰라도, 기름밥 먹으며 믹스커피로 주말을 버티던 나에게는 생명줄이자 세상에 대한 방패막이었습니다.
다시는 내 통장 잔고를 이따위로 바닥치게 두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내 가족과 내 새끼들 입에 들어갈 밥줄을 쥐고 있는 지금도, 가공 프로그램의 숫자 하나를 입력할 때마다 그 1,420원을 떠올립니다. 내일도 아침 7시 반까지 현장 공구실로 출근해 0.005밀리미터 공차와 씨름해야 합니다. 두 아이 학원비와 다음 달 아파트 대출 이자를 생각하며, 묵묵히 내 자리를 지켜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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