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영관 불 꺼지면 옆자리에서 딱 두 시간만 푹 자야겠다,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눈꺼풀 안쪽에 모니터 잔상이 벌겋게 박혀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모래알 굴러다니듯 뻑뻑했지요. 셔츠 깃에서는 며칠 밤샌 쇠 비린내와 파스 냄새가 진동을 했고, 목덜미는 돌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 몸 상태로는 영화가 아니라 천하의 대단한 구경거리를 갖다 놔도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토요일 오후에 극장 복도로 끌려나온 건 순전히 열 살짜리 녀석 때문이었습니다. 몇 주 전부터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가며 아빠 쉬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얼굴이 눈에 밟혔거든요. 현관에서 찬물을 연거푸 끼얹으며 어푸어푸 세수를 세 번이나 하고 나왔는데도, 머릿속은 온통 멍한 잿빛이었습니다. 고소한 팝콘 기름 냄새 풍기는 로비 한복판에서, 작은 손에 팔을 붙잡힌 채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며 그저 상영관 불이 빨리 꺼지기만을 바랐습니다.
윙카 관람 전날 밤, 엔드밀 박살과 이틀 밤샘
금요일 새벽 세 시의 가공실 바닥은 정말이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습니다. CAM에서 공구 간섭 체크를 두 번이나 돌렸는데도 미세한 좌표 착오가 났더군요. 3축 머시닝센터 안에서 쾅 하는 굉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12파이 초경 엔드밀이 두 동강 나면서 튄 파편이 아크릴 방호벽을 때렸지요. 지그에 물려 있던 고가의 항공용 특수강 소재 하나가 그 자리에서 통째로 날아갔습니다. 스핀들 회전이 뚝 멈춘 적막 속에서, 한동안 담배 생각도 안 나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소재 단가도 워낙 비싼 데다, 당장 월요일 아침까지 검사 성적서 첨부해서 납품 트럭에 실어 보내야 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거래처 담당자 성격이 워낙 까다로워서 일정 펑크 나는 순간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요.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주저앉아 욕이나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원점 다시 잡고, 공구 경로를 싹 뜯어고쳐서 시뮬레이션부터 다시 걸었습니다. 그때부터 공장 구석 야전침대 근처엔 발도 못 붙이는 밤샘이 시작되었습니다. 0.005mm 공차를 다시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가공실 문 열고 닫을 때 들어오는 외기 온도에도 쇠가 미세하게 숨을 쉬니까요. 마이크로미터를 쥐었다 놓았다 수백 번을 반복하며 치수를 맞췄습니다. 쿨런트 연무기를 틀어놔도 뿜어져 나오는 기름 안개가 작업복 속옷까지 축축하게 파고들더군요. 쇠 깎아내는 날카로운 쇳소리 속에서 커피 믹스를 대여섯 봉지씩 때려 넣으며 버텼습니다. 토요일 아침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마지막 공정 수치가 도면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서둘러 방청유 바르고 에어건으로 칩 털어낸 뒤, 대기하던 납품 용달차 화물칸에 박스를 단단히 묶어 실어 보냈습니다. 멀어지는 용달차 꽁무니를 보는데 다리에 힘이 탁 풀리더군요. 손톱 밑에는 새까만 기름때와 쇳가루가 문신처럼 박혀 있었고, 등판에 덕지덕지 붙인 쿨파스 화끈거림만 몸뚱이에 남아 있었습니다.
상영관 들어서며 '두 시간 자야겠다' 했는데
의자에 몸을 털썩 파묻자마자 눈부터 감았습니다. 옆자리에서 아이가 바스락거리며 팝콘 통을 안고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저는 그저 상영 시간 동안 기절하듯 자다 나갈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고 웡카 녀석이 낯선 도시에 발을 딛는 장면부터 이상하게 눈이 안 감기더군요. 달콤한 동화라더니, 눈앞에 펼쳐지는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세상살이 바닥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글자 모르는 촌놈 하나 데려다가 말도 안 되는 세탁소 노예 계약서에 도장 찍게 만드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빚더미에 묶여서 억센 빨랫줄을 돌리고, 펄펄 끓는 증기통 닦으며 밤낮없이 갇혀 일하는 모습이 남일 같지가 않더군요. (솔직히 세상 물정 모르면 코 베어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납기일과 가공 단가에 쫓겨서 기계 앞에 갇혀 지내는 공장 일상이랑 겹쳐 보이면서, 삐딱하게 누워 있던 허리가 저절로 꼿꼿하게 세워졌습니다. 아이 눈에는 솜사탕 구름이나 알록달록한 마법 사탕들만 신기하게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그 사탕 하나 만들어내려고 야밤에 남의 동물원 기린 젖을 짜러 가고, 축축한 빨래방 골방에서 쪽잠 자며 레시피 연구하던 그 지독한 고생길이 먼저 밟혔습니다. 세상에 그냥 나오는 결과물은 없고, 번지르르한 완제품 뒤에는 무조건 누군가의 뼈 깎는 노가다가 들어간다는 걸 아니까요. 호버초크를 먹고 사람들이 둥둥 떠오르는 장면에서는 아이가 신이 났습니다. 제 점퍼 소매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발을 동동 구르더군요. 그러더니 제 귀에 얼굴을 바짝 대고 "아빠, 나도 저거 먹고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 하고 귓속말을 속삭였습니다. 그 동그란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목 안쪽이 뻐근해졌습니다. 공장에서 튄 쇳가루에 팔뚝 긁히고, 손톱 밑에 낀 기름때가 비누로 박박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지긋지긋한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매달 카드값, 통장 잔고 쳐다보며 기계 소음 속에서 묵묵히 버티는 이유가 결국 저 작은 녀석 하나 때문이었지요. 내 손에 기름 냄새 찌들어 있는 덕분에, 아이는 아무 걱정 없이 저 마법 같은 화면 보면서 날아가는 꿈을 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끝, 사포 같은 손 꼭 쥐며 '데려와 줘서 고마워'
엔딩 크레디트 올라가고 불이 켜졌는데도 한동안 자리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휙 돌려 제 얼굴을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작은 손으로 제 손을 덥석 잡더군요. 쇳덩이 만지고 공구 갈아대느라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사포처럼 꺼칠꺼칠한 손이었습니다. 굳은살 때문에 딱딱한 손인데도 피하기는커녕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아빠, 오늘 극장 데려와 줘서 너무 고마워" 하더군요. 그 한마디를 듣는데 목구멍에 단단한 게 턱 걸려서 얼른 대답이 안 나왔습니다. 밤샘 작업 피곤하다고 툴툴대며 속으로 잘 생각만 했던 게 미안하기도 하고, 이 투박한 손을 꼭 쥐어주는 녀석이 고마워서 코끝이 찡했지요. 감정 들키기 싫어서 헛기침 한번 뱉어내고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재밌었으면 됐다. 그나저나 팝콘 다 먹고도 배는 안 고프냐?" 극장을 나와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가는 내내 아이는 제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춤추던 난쟁이가 웃겼느니, 초콜릿 강물이 진짜 있으면 빠져 죽어도 좋겠느니 쉴 새 없이 떠들어댔지요. 아웃렛 지하로 내려가 진한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컵을 사줬습니다. 아이는 입가에 시커멓게 초코 범벅을 해가며 플라스틱 숟가락질을 부지런히 하더군요. 숟가락 물고 입안 가득 오물거리는 아이 얼굴을 보는데, 묘하게 속이 뻥 뚫렸습니다. 전날 밤 머시닝센터 안에서 엔드밀 부러지며 식은땀 뻘뻘 흘렸던 순간도, 절삭유 뒤집어쓰며 밤새 가공실 지키던 끔찍한 시간도 싹 지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남들 보기엔 고작 몇천 원짜리 아이스크림 한 컵이겠지만, 저 달달한 초콜릿 거품 하나로 제가 바닥에서 흘린 땀값을 통째로 돌려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집 오자마자 도면 꺼낸 열 살, 아빠 공장이 마법 공방으로
집에 오자마자 겉옷도 안 벗은 녀석이 거실 바닥에 엎드리더니 종합장과 색연필을 꺼내 들었습니다. 혀를 쏙 내밀고 낑낑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그리더군요. 뭐 하나 싶어 슬쩍 다가가 어깨너머로 들여다봤더니, 종이 위에 크고 작은 태엽이랑 톱니바퀴, 레버들이 빽빽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가운데 상자 하나 그려놓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비밀 초콜릿 제조기'라고 적어놨더군요. 아이는 제가 뒤에 서 있는 걸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케치북을 쑥 내밀었습니다. "아빠, 아빠 공장에 있는 커다란 기계로 이거 똑같이 만들 수 있어?" 하고 묻더군요. 열 살짜리 눈에는 쇳덩이 깎아대는 CNC 머시닝센터가 동화에 나오는 마술 상자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 0.005mm 공차 잡느라 밤새 속 썩이던 그 기름때 묻은 기계가, 아이 머릿속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물건 뚝딱 만드는 환상의 기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어 피치도 없고 가공 간섭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낙서였지만, 진지한 눈빛을 보고 웃어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턱을 긁적이며 도면을 뜯어보는 척 능청을 떨었지요. "야, 치수도 하나 없고 투상도 안 맞아서 이대로 깎으면 공구 다 날아간다. 자 대고 도면 똑바로 다시 그려오면, 아빠가 쇠로 한번 기가 막히게 깎아봐 주마." 제 말에 신이 난 녀석은 지우개 가루를 날리며 도면 수정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론 "오늘도 기계로 멋있는 거 만들고 왔어?" 하고 먼저 물어봐 주더군요.
파스 냄새 푹푹 풍기며 파김치가 되어 현관문을 열 때마다, 녀석은 마법사가 일터에서 퇴근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저를 맞이합니다. 그 애가 상상하는 멋있는 물건이 도대체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그 반짝이는 질문 하나를 듣기 위해서라도, 아빠는 내일 아침 또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현장 바닥에서 쇠를 깎아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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