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안이 씁쓸하다 못해 텁텁한 쇠 맛이 감돌더군요. 영화 파운더의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텔레비전 화면이 꺼졌는데도 한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식구들 다 잠든 고요한 거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알코올이 참 유난히도 쓰게 긁고 내려갔습니다. 낮에 공장에서 하루 종일 기름 냄새 맡으며 모니터 속 CAM 툴패스만 들여다보다 온 날이었습니다. 피곤해서 그냥 곯아떨어지려다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틀어놓은 게 화근이었지요. 화면 속 레이 크록이라는 장사꾼이 남의 기술과 시스템을 어떻게 통째로 삼켜버리는지 지켜보는 내내, 십수 년 전 겪었던 끔찍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줄줄이 엮여 나왔습니다.
영화 파운더 속 맥도날드 형제를 보며 든 생각
입안이 씁쓸하다 못해 텁텁한 쇠 맛이 감돌더군요. 맥도날드 형제가 테니스 코트에 분필로 주방 동선을 하나하나 그어가며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을 완성하던 그 초반 장면부터 사실 속이 꼬였습니다. 주방 배치 하나, 햄버거 패티 굽는 초 단위 시간까지 피땀 흘려 잡은 그 정교한 표준화는 가공 현장으로 치면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잡아낸 최적의 지그와 공정 사이클 타임이었습니다. 기술 하나 믿고 우직하게 일하면 평생 밥은 먹고산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왔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게 얼마나 순진하고 멍청한 핑계였나 싶어 헛웃음이 튀어나왔습니다. 맥도날드 형제는 순수한 장인이었고, 자기들이 만든 그 완벽한 시스템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멍청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땀방울의 과실은 정작 기름 한 방울 안 묻혀본 레이 크록이라는 영업 브로커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갔습니다. 부동산을 장악하고 프랜차이즈 상표권을 빼앗아 원래 주인의 이름마저 매장에서 떼어내게 만드는 꼴을 보는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습니다. 자본과 시스템을 무기로 남의 기술을 후려치고 삼키는 짓거리가 어디 1950년대 미국 햄버거 가게 이야기뿐이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공단 구석구석에서 하청업체 피고름 짜내며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익숙한 현실이었습니다.
반도체 브라켓 가공, 0.01mm와 살 3kg
영화를 보다 보니 7~8년 전, 2차 벤더사에서 들고 왔던 난가공 반도체 장비 브라켓 일이 떠올랐습니다. 도면을 펴자마자 욕이 절로 나오는 구조였지요. 얇은 판재 형상인데 평탄도와 가공 공차를 무려 0.01mm 안에 맞추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조금만 클램핑을 세게 해도 휘어버리고, 엔드밀이 지나가는 열에도 제품이 엿가락처럼 뒤틀리는 까다로운 물건이었습니다. 그거 잡아내겠다고 꼬박 2주 동안 퇴근도 못 하고 공장 바닥에 처박혀 살았습니다. 뒤틀림을 막으려고 전용 지그를 밤새 직접 깎아 만들고, 황삭과 정삭 사이클을 수십 번 쪼개가며 공정을 잡았습니다. 밥도 제때 못 챙겨 먹어서 그 보름 남짓한 사이에 살이 3kg이나 쑥 빠지더군요. 겨우 공차를 완벽하게 잡아내서 초도 납품을 성공시켰을 때 개당 가공 단가는 8만 원이었습니다. 그 난리를 치며 안정화시켜 놓았더니, 딱 석 달째 되는 날 원청 구매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뜸 단가를 5만 5천 원으로 낮춰달라고 통보를 해오더군요. 한 번에 무려 30%를 후려치겠다는 심보였습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지만, 우리 같은 영세 임가공 공장은 늘 그렇듯 ‘단독 협력업체 등록’과 ‘향후 1년 치 대량 물량 보장’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물량이 터져 나오면 마진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그 달콤한 거짓말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공정 최적화 보고서라는 명목으로 우리가 몇 주 동안 피땀 흘려 작성한 A4 십수 장 분량의 공구 데이터, 지그 도면, 가공 조건표를 싹 긁어갔습니다. 그 기술서를 순순히 넘겨준 순간,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 파트너가 아니라 언제든 단가 후려치고 갈아치울 수 있는 단순 부품 조립 공장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었습니다.
기술서 복사본이 팩스로 돌아온 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질 게 터졌습니다. 인근 공단에서 임가공 공장을 하는 친한 형님한테서 점심시간 무렵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지요. 대뜸 "야, 너희 요새 반도체 브라켓 치는 거 있지? 그거 우리 공장 팩스로 도면이랑 가공 매뉴얼이 들어왔는데, 이거 네 글씨체 아니냐?"라고 묻더군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우리가 밤새워 정리해서 넘겨준 그 기술서 복사본을, 원청 구매팀 놈들이 인근 외주 공장 대여섯 군데에 팩스로 싹 뿌려버린 거였습니다. 그러고는 ‘이 가공법 그대로 따라서 5만 원에 칠 수 있는 업체’를 찾는 최저가 입찰을 붙여버린 것이지요. 남의 노하우를 무기 삼아 남의 등에 칼을 꽂는 전형적인 짓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원청 담당자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른 공장에서 4만 8천 원에 쳐주겠다고 나왔으니, 우리 보고 4만 7천 원에 맞출 거냐 말 거냐 묻는 아주 당당한 목소리였습니다. 옆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듣고 계시던 우리 사장님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수화기에 대고 거칠게 호통을 치고는 전화를 단칼에 끊어버렸습니다. 그 한 번의 통화로 우리 공장 월 매출의 40%가 공중으로 날아갔습니다. 물론 꼬시게도, 그 5만 원에 물건을 물어간 공장에서 가공한 수백 개의 브라켓은 열변형을 잡지 못해 전량 불량이 났습니다. 원청 조립 라인이 하루 반 동안 올스톱되는 대형 사고가 터졌지요. 사색이 된 원청 이사가 우리 공장으로 직접 차를 몰고 내려와 제발 원래 단가대로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더군요. 하지만 사장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공장 문간에서 단칼에 내쫓아 버렸습니다.
월 1,500만원 공백, 반년의 생지옥
통쾌한 복수극 같지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장 다음 달부터 월 1,500만 원에서 1,800만 원에 달하던 고정 매출이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렸으니까요. 기계 서너 대가 불이 꺼진 채 차갑게 식어가는 모습을 공장 구석에서 지켜보는 건 정말 피가 마르는 고통이었습니다. 공장 월세는 매달 꼬박꼬박 빠져나가고, 장비 리스료에, 기계 가동을 안 해도 청구되는 기본 전기세 고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사장님은 자기 집 담보 대출에 마이너스 통장 한도까지 털어가며 제 월급과 직원들 급여를 틀어막았습니다. 어린 두 아이 학원비에 아파트 대출 원리금 나갈 날짜는 매달 어김없이 돌아오는데, 월급날 사장님이 통장으로 돈을 꽂아줄 때마다 고마움보다 미안함과 생계에 대한 공포가 먼저 목을 죄어왔습니다. 그 공백을 메우겠다고 반년 동안 들어오는 잡일이란 잡일은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습니다. 남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더럽고 까다로운 단품 임가공을 치느라 매일 새벽 1시, 2시까지 쇳가루를 뒤집어썼지요. 집에 들어가면 애들 자는 숨소리만 간신히 확인하고, 공장 사무실 간이소파에서 새우잠으로 2~3시간 눈 붙이고 다시 기계를 켜는 날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그 지옥 같은 반년 동안 사장님이나 저나 몸무게가 5kg씩 빠지고, 위장약을 달고 살았습니다. 다행히 시제품 정밀 가공 쪽으로 입소문이 조금씩 나면서 새 거래처 두 곳을 뚫어 공장은 간신히 정상 궤도로 돌아왔습니다.
상처뿐인 승리였죠. 그 일 겪고 나서는 아무리 달콤한 소리를 지껄여도 계약서와 도면 넘겨줄 땐 눈에 불을 켜고 의심부터 하는 지독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영화 속 맥도날드 형제처럼 억울한 장인으로 남아 망해버리느니, 다소 깐깐하고 독해졌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내 기술과 식구들 밥벌이는 내가 악착같이 지켜내야 하니까요. 내일 아침에도 변함없이 8시 전까지 공장 문을 열고 기계 원점 복귀부터 잡아야 하니, 이제 그만 쓴 입 헹구고 자리에 누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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