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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속 두 퇴물 히어로가 남긴 묵직한 가장의 무게

by cow85 2026. 9. 18.

데드풀과 울버린 영화 공식 포스터

맥주 캔이 나도 모르게 손안에서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시계 바늘을 보니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거실 바닥엔 알루미늄 캔 따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정도로 적막했습니다. 낮에 가공 센터 물량 맞추느라 도면 치수와 지코드(G-code) 숫자를 온종일 뚫어져라 쳐다본 탓에 눈알이 뻑뻑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공차를 맞추겠다고 씨름하다 퇴근하면 머릿속이 뿌옇게 타버린 느낌이 들곤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큰놈과 이제 유치원 들어간 둘째 녀석이 곤히 잠든 방 문을 살며시 닫아걸었습니다. 집사람도 하루 종일 집안일에 애들 챙기느라 지쳤는지 먼저 곯아떨어졌더군요. 온 집안의 불을 다 끄고 텔레비전 화면 불빛만 희미하게 켜둔 채 캔맥주 하나를 깠습니다. 그렇게 불 꺼진 거실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OTT로 틀어둔 영화가 바로 데드풀과 울버린이었습니다.

 

1. 거실 불 끄고 혼자 본 데드풀과 울버린

화면 안에서는 두 놈이 시작부터 정신 사납게 거친 말을 뱉고 치열하게 부딪쳐댔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B급 유머로 범벅된 화려한 액션 오락 영화가 분명합니다. 저도 처음 삼십 분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피식거리며 헛웃음을 흘렸습니다. 하루 종일 쇳소리와 기름 냄새에 절어 있던 머리를 식히기에는 딱 좋은 킬링타임용이라고 넘겨짚었습니다. 극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화면 속 광경이 영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쫄쫄이를 입은 녀석이나 샛노란 슈트를 걸친 녀석이나, 알고 보면 전성기는 진작에 지나버린 퇴물들이었습니다. 한 시절을 호령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조직에서 밀려나 중고차를 팔거나 술에 절어 살더군요. 그 꼴이 남 일 같지 않아 자꾸만 목구멍으로 맥주를 연거푸 넘기게 되었습니다. 온몸에 칼을 맞고 상처가 찢겨 나가면서도 진흙탕을 구르는 그 처절한 몸짓에서 묘한 동질감이 올라왔습니다.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가볍게 제압하는 게 아니라,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도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는 모습이었습니다. 현장 바닥에서 기계 밑판 뜯어내며 기름때 뒤집어쓰던 제 20대 시절도 문득 스쳐 지나갔습니다. 몸뚱이 하나 부서져라 굴러야 겨우 다음 날로 넘어갈 수 있던 그 지독한 시절 말입니다. 스크린 속에서 두 퇴물이 서로 멱살을 잡고 바닥을 구를 때 제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갔습니다. 영화가 주는 시각적 쾌감 때문이 아니라, 저들이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삶의 무게가 너무나 선명하게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원해야 할 맥주 캔은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고, 손안에서 찌그러진 채 바닥에 알루미늄 주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2. 식구들 밥상머리 하나 지키겠다고 뛰어든 두 퇴물

영화 막바지에 데드풀이 반물질 장치로 혼자 걸어 들어갈 때 울버린이 닫히려는 문을 기어이 부수고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혼자 들어가면 온몸의 세포가 찢겨 죽는 걸 뻔히 알면서도 둘은 손을 맞잡고 그 지옥불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거창한 영웅주의나 대의명분 따위로 포장된 자살특공대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무식하고 처절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둘이 지키고 싶었던 세계라는 게 대단한 은하계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내 주변의 소중한 몇 사람, 매일 저녁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는 식구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 소박한 밥상 하나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제 목숨을 칩으로 걸고 도박판에 뛰어든 셈입니다. 40대 가장이 되고 나니 그 무모한 고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습니다. 매일 아침 공장에 출근해 정밀 가공 기계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작업 일보를 확인합니다. 쇳가루 날리는 챔버 안을 들여다보며 황삭과 정삭 공정을 점검하는 하루 열두 시간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한 달 내내 절삭유 냄새를 뒤집어쓰고 버티는 이유는 매달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아파트 대출 이자와 애들 학원비 때문입니다. 카드 결제일에 계좌 잔고를 채워 넣고 나면 통장은 다시 바닥을 드러내지만, 이번 달도 식구들 밥줄은 안 끊겼다는 안도감이 하루를 지탱합니다. 세상을 구하는 위대한 영웅은 우리 같은 평범한 기술자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장 내 새끼 입에 따뜻한 밥 한 숟갈 들어가는 걸 지켜내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뼈가 갈려 나가고 연골이 닳아 없어져도 그 밥줄 하나만큼은 기를 쓰고 붙잡고 늘어지는 게 가장의 숙명입니다. 문을 부수고 기어이 함께 지옥 속으로 뛰어들던 두 녀석의 눈빛에서, 매일 아침 작업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는 수많은 아버지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3. 허리 4번 5번, 6~7년째 달고 사는 훈장

영화 속 녀석들은 상처를 입어도 몇 초 만에 살이 돋아나는 재생 능력이 있지만, 현실의 우리 몸뚱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 요추 4번과 5번 디스크는 이미 6~7년 전부터 제자리를 벗어나 신경을 누르고 있습니다. 현장 막내 시절에 묵직한 바이스나 가공용 강재를 요령 없이 맨몸으로 들어 나르던 대가가 마흔을 넘기니 정확하게 청구서로 날아왔습니다. 비가 오거나 기압이 내려앉는 날 아침이면 침대에서 똑바로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허리에 칼로 긋는 듯한 통증이 올라와 옆으로 슬그머니 굴러 침대 모서리를 손으로 짚고 끙 소리를 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킵니다. 세수하려고 허리를 숙이는 짧은 순간조차 두려워서 세면대 모서리에 팔꿈치를 바짝 괴어야 합니다. 내가 짠 가공 프로그램대로 깎여 나오는 정밀한 쇳덩이보다 내 척추뼈가 훨씬 더 엉망진창으로 마모되어 있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주방 구석에 숨겨둔 소염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고 두꺼운 복대를 허리에 꽉 조여 맵니다. 아이들이 깰까 봐 조심조심 현관문을 나서지만,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순간까지도 다리 쪽으로 저릿한 신경통이 뻗칩니다. 쉴 수는 없습니다. 납기가 코앞에 닥친 머시닝센터 라인은 나 하나 허리 아프다고 멈춰 서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지어온 독한 약봉지는 식탁 위에 두지 않고 가방 깊숙한 주머니에 쑤셔 박아둡니다. 아침에 가족들 앞에서 약봉지 부스럭거리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공장에 도착해 라커룸 구석에서 혼자 비닐을 뜯어 물도 없이 침으로 삼켜 넘깁니다.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십여 분이 지나 허리의 통증이 둔탁하게 마비되어 갈 때쯤, 비로소 또 하루를 버텨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섭니다. (이곳에 두 주인공이 등을 맞대고 있는 장면이나 어둑한 작업 현장 사진 1장을 넣으시면 좋습니다)

 

4. 약국 문 앞 그 한마디와 찜질팩 뒷모습

작년 겨울에 허리가 완전히 내려앉아 정형외과 진료실에 실려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엠알아이(MRI) 판독 영상을 띄워놓고 의사가 수술 이야기를 꺼낼 때, 옆에 앉아 있던 집사람의 손을 보았습니다. 말없이 제 작업복 바짓가랑이를 쥐고 있었는데, 손톱 밑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고 있더군요. 그 떨림이 허리 통증보다 더 아프게 살갗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약국 문을 열고 나오는데 찬 바람이 훅 끼쳐왔습니다. 앞서 걸어가던 집사람이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쏘아붙였습니다. 누가 당신더러 혼자 다 짊어지라고 했냐고, 왜 미련하게 참다가 이 지경을 만드냐고 화를 내더군요. 매일 야근하고 주말 특근까지 뛰며 돈 몇 푼 더 쥐어 오는 게 가장 노릇인 줄 알았던 제 자신이 참으로 못나 보였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 부부 사이에는 말없이 지키는 묵언의 합의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집사람은 제가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허리가 어떻냐고 대놓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제가 씻고 안방에 누워 있으면 전자레인지에 뜨겁게 데운 찜질팩을 말없이 허리 밑에 밀어 넣어주고 문을 닫고 나갑니다. 어두운 방안에서 그 사람의 지친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릅니다.

 

내가 무너지면 저 사람과 저 작은 아이들의 울타리가 단번에 주저앉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리 욱신거려도 '아직 쓰러질 때가 아니다' 하고 다시 버티게 됩니다. 내일 아침에도 알람 소리에 맞춰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조용히 허리 복대를 감아쥘 것입니다. 두 아이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 기름 냄새 자욱한 현장으로 나가 묵묵히 기계 앞에 서서 내 몫의 밥벌이를 해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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