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어컨 빵빵한 영화관으로 피서나 가자 싶어서 애들이랑 집사람 데리고 동네 극장으로 갔습니다. 한낮 기온이 35도를 훌쩍 넘어가던 주말이었는데, 평일 내내 기름 냄새 배인 현장과 모니터 앞을 번갈아 오가다 보니 휴일만큼은 시원한 곳에서 머리나 좀 식히고 싶었습니다. CAD 화면 속에서 선 하나, 공차 100분의 1밀리미터 맞추느라 눈알이 뻑뻑했던 한 주였습니다. 매표소에서 팝콘 라지 사이즈 하나에 콜라 두 잔 받아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양옆으로 초등학생 두 녀석이 신나서 빨대를 물고, 아내도 모처럼 땀을 식히며 스크린 광고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냥 시원한 바람 쐬면서 가볍게 범죄 액션 영화 한 편 보고, 저녁이나 사 먹고 들어가면 딱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더위를 피하러 들어간 피서용 나들이였습니다.
에어컨 피서 갔다가 팝콘 집던 손이 멈춘 순간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세관 계장이 탄 감시선이 칠흑 같은 밤바다를 덮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달착지근한 카라멜 팝콘을 집어 올리던 제 손이 바구니 안에서 뚝 멈춰 섰습니다. 해녀들이 생계를 걸고 건져 올린 물건들을 단속반이 들이닥쳐 낚아채고, 캄캄한 파도 위에서 배들이 부딪치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지더군요. 바삭거리며 팝콘을 씹던 제 턱관절이 그대로 딱 굳어버렸습니다. 단속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그물에 감기고 배 스크루에 빨려 들어가는 밤바다 익사 장면을 보는데, 머릿속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화면 속 사람들의 비명과 물보라가 단순한 오락 영화의 특수효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들도 결국 내 새끼 밥상에 고기반찬 하나 더 올리고, 집안 살림 조금이라도 펴보겠다고 그 깜깜한 바닥까지 기어 들어갔을 텐데 말입니다. 그 모습이 꼭 벼랑 끝에 몰린 가장의 추락처럼 다가왔습니다. 현장에서 기계 잘못 물려서 고가의 소재가 통째로 터져 나가거나, 거래처 납기일 맞추지 못해 결제 대금이 묶였을 때 엄습하는 그 서슬 퍼런 압박감이 그대로 겹쳐 보였습니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사람들의 허우적거림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깊숙이 걸려 침조차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습니다. 기름 묻은 공구 들고 바닥에서 기계를 배우던 이십 대 초반 막내 시절 생각이 스쳤습니다. 실수 한 번에 손가락이 날아갈 뻔했던 선반 작업대 앞의 공포가 바닷속 압력과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차가운 에어컨 바람 밑에서도 등줄기로 진땀이 배어 나왔습니다.
바닷속 사투 장면, 영화 속 3~4분이 체감 30분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작은놈이 겁을 먹었는지 제 셔츠 팔소매를 양손으로 꽉 부여잡았습니다. 그러더니 얼굴을 제 옆구리에 푹 파묻고는 영화관 화면을 쳐다보지도 못하더군요. 잔인하고 거친 물속 난투극 소리가 서라운드 스피커를 타고 극장 안을 쩌렁쩌렁 울려대고 있었습니다. 작은 녀석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저거 다 가짜 연기야" 하고 귓가에 속삭여 주었습니다. 아이의 그 조그맣고 보드라운 고사리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순간, 이상하게 속은 더 서늘해졌습니다. 내가 지켜내야 할 내 피붙이의 온기인데, 내가 한순간이라도 삐끗하면 이 아이들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장의 무거운 현실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 바닷속 사투는 실제 시간으로 한 3~4분 남짓 이어졌을 겁니다. 제게는 체감상 30분은 훌쩍 넘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가 무서워서 제 팔을 쥐어짜듯 힘을 주고 있는데, 손아귀에 땀이 흥건하게 차오르는데도 차마 그 손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의 무게가, 가장이라는 자리가 짊어져야 할 진짜 무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스크린의 배경이 잠잠해지고 다른 장면으로 화면이 넘어가서야 아이의 굳어 있던 어깨가 천천히 풀렸습니다. 작은 녀석이 고개를 들고 다시 스크린을 쳐다보는 걸 보고 나서야, 저 역시 가슴속에 꽉 쥐고 있던 숨을 후- 하고 길게 내뱉었습니다. 스크린의 화려함 이면에 깔린 생존의 사투가 제 일상의 긴장감과 똑 닮아 있었습니다.
극장 나와서 집사람이 던진 한마디
영화를 다 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는데 집사람이 묵묵히 걷다가 툭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요즘 애들 학원비 번다고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이렇게 발버둥 치는데, 저 바닷속 해녀들이랑 우리가 뭐가 다른가 싶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둔탁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매달 나가는 주택담보대출 이자에 두 녀석 학원비, 물가까지 치솟아 숨이 가쁜 우리 집 사정이 그대로 요약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극장 근처 오래된 국숫집에 들어가 잔치국수와 왕만두를 시켰습니다. 집사람과 저는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말없이 갓 쪄낸 만두 하나를 집어서 집사람 앞접시에 덜어주었고, 집사람은 국수를 크게 한 젓가락 떠서 아이들 그릇에 나눠 담아주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달궈진 차에 올라타자 문을 열자마자 찜통 같은 열기가 훅 끼쳐왔습니다.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제일 세게 틀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게, 식구를 건사하고 먹고산다는 게 참 독하고 질긴 일이구나 싶었습니다.
룸미러를 슬쩍 올려다보니 뒷좌석에서 배를 채운 아이들은 장난을 치다 지쳐 잠들어 가고 있었고, 조수석의 집사람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현장으로 출근해 정밀 가공 기계 소음 속에서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씨름하고 기름 묻은 도면을 들여다보겠지만, 거울 속에 비친 저 얼굴들을 보며 다시 이를 악물게 됩니다. 가장은 무섭고 불안한 걸 혼자 삼키고 '별거 아냐 밥이나 먹자' 해야 식구들이 발 뻗고 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일도 기계 앞에 서서 묵묵히 제 몫의 땀을 흘리며 버텨낼 생각입니다. 식구들이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다면 그 정도 피로쯤은 몇 번이고 삼켜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