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야심한 새벽, 불 꺼진 식탁에 멍하니 앉아 차가워진 맥주 캔을 쥐고 있었습니다. 밤 11시까지 머시닝센터 물림 상태 확인하고 단차 맞추느라 눈알이 뻑뻑했던 날이었습니다. 0.01밀리미터 어긋나서 제품 서너 개 날려 먹으면 하루 일당이 통째로 날아가는 판이라,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어깨가 돌덩이처럼 굳어 있더군요. 집에 들어와 대충 씻고 누워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는 내일 쳐내야 할 납기 일정과 매달 25일이면 칼같이 빠져나가는 아파트 담보대출 이자, 그리고 아이들 학원비 명세서가 톱니바퀴처럼 엉켜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는데 가장이라는 놈이 할 줄 아는 건 쇠 깎는 일밖에 없다는 게 참 버겁게 느껴지던 밤이었습니다.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캔 하나 들고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무심코 리모컨을 쥐었습니다. 딱히 무언가를 보겠다는 생각도 없이 케이블 채널을 툭툭 넘기다가, 화면 가득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흘러나오는 영화 한 편에 덜컥 손가락을 멈췄습니다. 화면 속에는 시골 형사 조필성이 잔뜩 찌그러진 얼굴로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목이나 축이고 들어가 잘 요량이었는데, 식탁 위에 놓인 맥주가 다 미지근해지도록 리모컨을 바닥에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거북이 달린다, 새벽 채널 돌리다 걸린 영화
그 영화가 바로 김윤석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거북이 달린다'였습니다. 처음에는 흔해 빠진 시골 순경의 코믹한 활극 정도로 보였습니다. 도박판에 기웃거리다 마누라한테 쥐어터지고, 딸내미 돼지 저금통 털어서 한탕 노리는 꼴이 참 한심하기도 하고 실소가 터지더군요. 저 역시 20대 초반 기름 밥 먹기 시작할 때는 월급날마다 친구들과 당구장이나 기웃거리며 허투루 돈 쓰던 철부지 시절이 있었기에, 저 인간도 참 대책 없는 인생을 사는구나 싶었습니다. 화면 속 조필성은 무능하고 게으른 공무원이었습니다. 마누라의 잔소리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니고, 소싸움 판에서 돈 좀 따보겠다고 헛꿈을 꾸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건달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헐렁한 시골 풍경 이면에 깔려 있는 현실이 자꾸만 제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만화방 구석에서 쥐꼬리만 한 돈으로 쪼들리며 사는 집안 꼴, 큰딸 학원비조차 제때 쥐여주지 못해 눈치를 살피는 그 초라한 기색이 화면 밖으로 고스란히 묻어 나왔습니다. 제가 매일 공장에서 겪는 압박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거래처 담당자는 납기를 하루만 당겨달라고 닦달하고, 가공 단가는 몇 년째 제자리인데 절삭 엔드밀 공구 값은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습니다. 현장에서 땀 흘려 기계를 돌려도 통장에 남는 돈은 늘 쥐꼬리만 해서, 퇴근길마다 내가 우리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고 있는 게 맞는지 자문하곤 했습니다. 그런 묵직한 답답함이 가슴 한가운데 얹혀 있던 때라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필성이 소싸움으로 거액을 따내고 기세등등하게 웃을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같이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돈으로 빚도 갚고 애들 학원비도 내고 마누라 목에 힘도 좀 주겠구나 싶었는데, 바로 그 순간 탈옥수 송기태가 나타나 그 돈을 몽땅 털어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채널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흙바닥 기어가는 눈빛, 웃음기가 싹 가셨다
신출귀몰한 탈옥수 송기태에게 돈도 털리고, 다섯 손가락 다 꺾이고,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홀딱 벗겨진 채 팽개쳐지는 장면부터 영화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동네 사람들한테는 망신살이 뻗치고, 경찰 직위에서는 잘려 나가며, 가장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까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 처참한 몰골을 마주하는 순간 제 입가에 머물던 웃음기는 싹 가셔버렸습니다. 특히 산속에서 송기태를 다시 마주쳐 흠씬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진흙탕 바닥을 기어가는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았을 때였습니다. 그건 범인을 잡아서 특진을 하겠다는 경찰의 눈빛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내 식구들 입에 들어갈 밥줄을 쥐어뜯기고, 내 새끼들 앞에서 아비 노릇조차 못 하게 만든 놈을 향해 내지르는 벼랑 끝 가장의 악다구니였습니다. 그 악에 받친 처절한 시선이 제 명치 끝을 묵직하게 때렸습니다. 새벽 불 꺼진 식탁, 차가워진 맥주 캔 쥐고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직장 생활 15년 차, 매일 아침 작업복을 입고 현장으로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바로 저것이었습니다. 납기가 펑크 나서 거래처 사장한테 고개 숙여 욕을 먹을 때도, 한밤중에 기계에 빨간 알람 불 뜨고 멈춰 서서 밤샘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우리는 그 자리를 도망치지 못합니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내 처자식이 굶는다는 그 단순한 공포 하나 때문에, 구겨진 자존심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기름때 묻은 손으로 다시 기계를 켭니다. 조필성이 흙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기어가던 그 처절한 몸짓이, 매일 잔업과 특근을 버텨내는 우리네 출근길과 무엇이 다른가 싶었습니다. 세련되고 날렵한 탈옥수는 말끔한 칼로 급소를 찌르며 여유를 부리지만, 둔하고 배 나온 조필성은 그저 온몸으로 얻어맞으면서도 끝끝내 다리통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기술도 없고 요령도 없지만, 물러설 곳이 없는 가장은 원래 그렇게 싸우는 법입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헐떡이는 그 얼굴을 보면서 맥주 캔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습니다.
엔딩 끝나고, 까치발로 작은방 문 열었다
마지막 결투 끝에 결국 탈옥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운동회 현장에 나타나 딸아이에게 약속했던 머리핀을 건네는 장면이 지나갔습니다. 엔딩 크레딧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저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리모컨의 TV 전원 버튼부터 조용히 껐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멍하니 벽시계 초침 소리를 들었습니다.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나 까치발로 조심조심 복도를 걸어 작은방 문을 살며시 열었습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두 아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이불 밖으로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조그만 발들을 손으로 살살 밀어 넣어주고, 이불깃을 턱 밑까지 조심스레 올려 덮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발바닥이 참 따뜻했습니다. 그 온기를 손끝으로 느끼는 순간, 낮 동안 현장에서 치이며 받았던 스트레스와 통장 잔고를 보며 짓눌렸던 답답함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저 작은 발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내가 매일 쇳가루를 마시고 공차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조필성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끝까지 버텼던 이유도 결국 이것 하나뿐이었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능하고 미련한 꼴통이라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의 잠든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단단한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B급 코미디 오해, 이 영화의 진짜 알맹이
'거북이 달린다'를 두고 많은 이들이 가벼운 시골 수사물이나 흔한 B급 조폭 코미디 영화로 치부하곤 합니다. 킬링타임용으로 대충 웃고 넘길 영화로 짐작하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개봉 당시에도 같은 배우가 출연했던 '추격자'의 성공에 기댄 아류작이 아니냐는 편견이 짙었습니다. 잔인하고 속도감 넘치던 그 영화에 비해, 충청도 시골을 배경으로 늘어지는 템포 때문에 어설픈 모조품으로 지레짐작한 관객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알맹이는 범죄를 소탕하는 경찰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바닥까지 짓밟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자존심 한 조각을 되찾으려는 한 가장의 사투기입니다. 세상은 저만치 앞서서 날아가는데, 나 같은 놈은 배 나오고 둔해서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숨이 턱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물고 늘어져야지요. 정밀 가공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기계가 제아무리 최신형이고 프로그램이 완벽해도, 결국 마지막 치수를 맞추고 불량을 잡아내는 것은 현장 작업자가 기름때 묻혀가며 몇 번이고 버니어캘리퍼스로 재어보고 버텨내는 끈덕진 시간입니다. 화려하게 잔재주 부리는 놈들은 현장에서 오래 못 갑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남들이 비웃어도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뚝심, 그것이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알맹이입니다.
내일도 공장 바닥에서 쇳가루를 뒤집어쓰고 진흙탕을 구르겠지만 기어코 버텨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다짐하며 방문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갔던 그날 밤, 저는 모처럼 아무런 잡생각도 없이 유독 푹 곯아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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