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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15년 차 정밀 가공 기술자이자 두 아이 아빠의 시선

by cow85 2026. 10. 7.

콰이어트 플레이스 영화 공식 포스터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는데 거실 불도 못 켜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리모컨을 쥔 손바닥에 땀이 배어 축축한 줄도 몰랐습니다. TV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꺼지고 까만 화면에 제 얼굴이 비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간 잔업을 마치고 들어와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는데 머릿속은 날카로운 칩이 튄 것처럼 온통 곤두서 있더군요. 낮에 공장에서 하루 종일 웅웅거리던 머시닝센터 주축 소리가 귓가에 맴돌던 참이었습니다. 납기 맞춘다고 가공 속도를 올리고, 공구 마모될까 봐 신경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보낸 하루였습니다. 피곤해서 그냥 곯아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불 꺼진 거실 한구석에서 이 영화를 틀어놓고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굳어 있었습니다. 적막 속에서 들려오던 괴물들의 소리가 공장 기계실 소음보다 더 독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크레딧 올라가는데 불을 못 켰다

크레딧 올라가는데 불도 못 켜고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화면이 암전된 뒤에도 방 안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어서 헛기침 한 번 내뱉기가 조심스럽더군요. 소리를 내면 죽는다는 그 영화 속 규칙이 모니터 밖 제 거실까지 번져온 기분이었습니다. 작은 소음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숨 막히는 긴장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매일 마주하는 제 작업대 생각이 겹쳐졌습니다. 쇳가루 마셔가며 15년 현장 살았는데 그 마지막 비명 앞에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20대 초반 막내 시절에는 기름 묻은 장갑 끼고 칩 치우느라 정신없었고, 지금은 모니터 앞에 앉아 CAD 도면 띄워놓고 CAM 툴패스 뽑아내는 일을 합니다. 0.01mm 오차 하나에 몇백만 원짜리 원감이 날아가고 납기가 꼬이는 현장이라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삽니다. 그래도 15년 구르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무덤덤해졌다고 믿었습니다. 공구 부러지는 굉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짬밥이 생겼다고 여겼지요. 자만이었습니다. 영화 속 아버지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르는 그 순간에는 도저히 덤덤할 수가 없었습니다. 괴물을 유인하려고 가슴 속에서 쥐어짜 내던 그 고함 소리는, 같은 아비 입장에서 그냥 넘길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소리를 내면 바로 찢겨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새끼들 살리겠다고 온몸의 공기를 다 털어 넣어 질러버린 그 비명이 제 가슴팍을 정면으로 때렸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먹먹했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망설임 없이 저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통장 잔고는 늘 간당간당하고, 매달 빠져나가는 아파트 대출 이자에 애들 둘 학원비 영수증만 봐도 숨이 찹니다. 그런 얄팍한 생계 걱정 속에서 매일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목숨을 걸고 아이들의 방패막이가 되어버린 그 남자의 선택을 보면서 말문이 완전히 턱 막혀버렸습니다.

 

불 꺼진 방, 작고 통통한 손

소파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안방 문을 열었습니다. 영화의 여운 때문인지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조차 신경 쓰여서 손끝에 힘을 주며 아주 천천히 돌렸습니다. 침대 위에 두 녀석이 이불을 반쯤 걷어찬 채로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더군요. 그 고요한 숨소리를 듣는 순간에야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풀렸습니다. 잠든 아이의 작고 통통한 손을 가만히 쥐어봤습니다. 낮 동안 쇳덩이를 만지고 거친 도면 용지를 넘기느라 까칠해진 제 손바닥 틈으로, 녀석의 보드랍고 따뜻한 살결이 고스란히 닿았습니다. 이 조그만 손가락들이 제 손을 꼭 쥘 때마다 묘한 현실감이 듭니다. 내가 공장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찌든 기름내를 맡으며 버티는 이유가 바로 이 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가장이라는 짐이 짓누를 때마다 버티게 만드는 건 그 작은 숨소리들뿐입니다. 매달 날아오는 카드 명세서와 물가 상승률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도면 치수가 조금만 틀어져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나날입니다. 책임져야 할 입이 셋이나 딸려 있다는 압박감은 퇴근길 운전대 위에서도 늘 무겁게 얹혀 있습니다. 가끔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만큼 지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한밤중에 이렇게 방에 들어와 녀석들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무게가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나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내가 바닥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땅을 단단히 딛게 해주는 무게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속 아버지가 매일 지하실에서 무전기를 고치고, 아이들이 밟을 모래 길을 깔아두었던 심정이 고스란히 와닿았습니다. 지치고 닳아빠져도 아비는 결국 아이들의 내일을 만들어두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다시 배웠습니다.

 

다음 날 현장, 안전화 끈을 두 배로 조였다

다음 날 아침, 현장 락커룸에 앉아 안전화 끈을 평소보다 두 배 꽉 조여 맸습니다. 발목이 단단하게 조여오는 느낌이 들 때까지 힘껏 당겨 묶었습니다. 늘 신던 신발인데 발끝에 전해지는 감각이 유독 묵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다치거나 삐끗하면 내 뒤에 있는 우리 집 세 식구는 그대로 벼랑 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공장 바닥으로 들어서서 컴퓨터를 켜고 도면을 열었습니다. 0.01mm 치수 맞추는 손끝에 서늘할 정도로 무거운 책임감이 실렸습니다. 가공 공차가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떨어지는 난삭재 가공물이었는데, 마이크로미터를 쥐고 치수를 측정할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지경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대충 넘겼을 0.005mm 편차도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 도면 하나, 가공품 하나가 우리 가족 한 달 치 식비이고 아이들 학원비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선명했습니다. 사무실에서 공정 설계 프로그램을 돌리고, 다시 현장으로 내려가 공작기계 내부의 공구 세팅을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회전하는 주축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삭유 연기와 쇳가루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15년을 맡아온 이 익숙하고 퀴퀴한 냄새 속에서, 오늘은 단 한순간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믿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여기서 온전하게 하루를 버텨내야 했습니다. 딴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첫째와 둘째가 요란하게 뛰어나왔습니다. 절삭유 냄새 밴 채로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습니다. 작업복에 기름때 묻는다고 아내는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등짝을 때렸지만, 품에 안긴 아이의 무게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기계 소음 속에서 긴장했던 온몸의 피로가 그제야 스르르 녹아내렸습니다.

 

각오는 식어도 굳은살은 남는다

돌아보면 예전엔 안전장치 슬쩍 지나치고 공구 점검도 건성으로 넘기곤 했습니다. 15년 짬밥 믿고 자만한 탓이 컸지요. 그땐 왜 그랬나 싶습니다. '이 정도 속도면 문제없다', '이 공구는 아직 몇 타임 더 버틴다'며 감으로 밀어붙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기계 도어 센서를 바이패스해 두고 돌아가는 척 근처에 손을 불쑥 집어넣던 위험천만한 짓도, 경력이 쌓였다는 오만함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찔한 기억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계 스타트 버튼을 누르기 전, 딱 1초 멈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프로그램 원점 좌표가 맞는지, 척에 물린 소재가 제대로 물렸는지 다시 한번 육안으로 살핍니다. 그 찰나의 1초가 내 손가락을 지키고, 나아가 내 가정을 지킨다는 사실을 이제는 뼛속 깊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의 용기라는 것은 무모하게 기계 앞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사고 한 번 안 나게 끝까지 조심하는 데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감정적인 충격이나 다짐 같은 건 며칠 지나면 바쁜 일상 속에서 흐릿해지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보며 느꼈던 그 서늘한 전율도 시간이 흐르면 옅어질 테지요. 그러나 그때 몸에 새겨 넣은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고 작업대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살얼음판 같은 조심성이 안전화 끈 묶을 때마다 굳은살처럼 박여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어김없이 거친 작업화 끈을 팽팽하게 당겨 묶고 공장 문을 나섭니다. 대단한 영웅은 못 되어도, 내 새끼들 다치지 않고 온전하게 밥 먹일 수 있도록 내 자리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버텨내는 아비로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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