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트 간부라는 두 차장이 안기부 계단에서 양복을 빼입은 채 개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보다가 리모컨을 쥔 손을 멈췄습니다. 주말 잔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은 채 멍하니 TV를 켰던 시간이었습니다. 작업복 소매에 밴 절삭유 냄새가 코를 찔렀고, 모니터 CAM 화면에 하루 종일 띄워놓았던 공구 경로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더군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헛웃음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 기관의 차장급이라는 자들이 계단 바닥을 구르며 주먹질을 해대는 꼴을 보는데, 제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몇 년 전 우리 공장 바닥에서 벌어졌던 그 지긋지긋한 난장판이 겹쳐 보였습니다.
헌트 계단 난투극, 양복 입은 개싸움
영화 속 박평호와 김정도는 국가 안보니 대의명분이니 거창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하지만 계단에서 서로의 멱살을 부여잡고 구르는 그 순간만큼은 제 눈에 그저 벼랑 끝에 몰린 사냥개 두 마리로 보였습니다. 조직의 최고 정점에 있는 윗놈들이 '너희 중 하나는 간첩이고, 못 잡으면 네가 죽는다'며 칼자루를 쥐여주니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든 꼴이지요. 양복 깃이 찢어지고 넥타이가 바닥에 뒹구는 꼴을 보며 참 씁쓸했습니다. 고상한 척, 배운 척 폼은 다 잡던 인간들도 결국 자기 목숨 줄이 위태로워지면 시정잡배와 똑같이 주먹부터 나가는 법입니다. 겉보기엔 그럴싸한 안기부 청사 복도였지만, 실상은 진흙탕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도살장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상대방의 등에 칼을 꽂아야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명분은 화려했을지 몰라도, 결국 상대의 숨통을 끊지 못하면 내가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는 원초적인 공포가 그 주먹질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실려 있더군요.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화려한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이라기보다는, 밥그릇 뺏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의 가장 밑바닥 밑천을 그대로 까발린 장면이었습니다. 넥타이만 둘렀을 뿐이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꼴은 기름밥 먹는 공장 바닥의 사투와 정확히 똑같았습니다.
공장 치수 불량, 사장 한마디에 멱살
그 장면을 보며 몇 년 전 원청 납품 건으로 터졌던 대형 사고가 떠올랐습니다. 반도체 장비에 들어가는 알루미늄 정밀 가공품 수백 개에서 소수점 두 자리 공차 치수 불량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날이었습니다. 원청에서는 당장 전량 반품하겠다고 난리를 쳤고, 사무실 CAM 프로그램을 잡은 저와 현장에서 MCT 기계를 돌리던 조장 녀석 사이에 피 말리는 책임 공방이 붙었습니다. 프로그램 공구 보정값이 잘못 들어갔다는 조장의 주장과, 기계 세팅할 때 영점 기준을 제대로 안 잡은 조장의 과실이라는 제 주장이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서로 10년 넘게 형, 동생 하며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깟 치수 몇 푼 때문에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때 공장 사장이 들어와 쇳가루 날리는 현장 바닥에 원청 공문을 집어 던지며 한마디를 뱉었습니다. "이거 원청 물어내면 이번 달 장비 할부금도 안 나와. 누구 하나 옷 벗을 각오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와 조장 둘 다 눈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당장 다음 주가 아파트 담보대출 이자 빠져나가는 날이었고, 둘째 아이 치아 교정비로 수백만 원 목돈이 나가야 하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밀려나면 길바닥으로 나앉는다는 공포가 뇌를 마비시켰습니다. 쇳가루 냄새 찌든 콤프레샤 옆에서 마흔 넘은 사내 둘이 서로의 작업복 멱살을 틀어쥐고 육탄전을 벌였습니다.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치게 생겼다고 악을 쓰며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 같은 난투극의 결말은 참으로 허탈했습니다. 원청과 겨우 협의해 결손금 400만 원으로 막았고, 사장은 제 상여금과 조장의 상여금에서 각각 200만 원씩 까는 걸로 정리를 끝냈습니다. 둘이 죽일 듯이 틀어쥐고 있던 멱살이 사장의 그 담담한 정산 통보 한마디에 맥없이 스르륵 풀려버렸습니다.
장 뒤편 담배, 미안하긴 개뿔이
사태가 대충 수습되고 난 뒤, 손등에 피가 맺힌 채 공장 뒤편 자재 창고 구석으로 나갔습니다. 조장 녀석이 쭈그리고 앉아 있더군요. 저도 말없이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쇳가루 섞인 기름 냄새가 훅 끼쳐왔고, 우리는 연거푸 담배 연기만 허공으로 내뿜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미안하긴 개뿔이, 회사 윗놈들이 던져놓은 불량 딱지 하나에 똥줄이 타서 지들끼리 멱살 잡고 피 터지게 싸운 우리 꼴이 그냥 등신 같았을 뿐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우리는 그냥 쓰고 버려지기 쉬운 소모품 볼트 너트였는데, 그걸 잊고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으려 들었던 거지요. 내 생계가 걸려 있다는 공포 때문에 10년 넘게 밥 같이 먹던 동료를 죽일 놈으로 몰아세웠던 제 자신이 역겨웠고, 저놈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집에 들어가서는 아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회사 사정이 좀 꼬여서 이번 분기 상여금이 분할 지급으로 바뀌었다고 거짓말을 둘러댔습니다. 통장에 찍혀야 할 200만 원이 증발해 버렸는데, 그걸 내 손등에 난 상처와 맞바꿨다는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베란다 창틀을 잡고 서서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는데, 가장이라는 자리가 이렇게 비참하고 무거운 것인가 싶어 속이 바짝 타들어 갔습니다.
살점 같이 뜯겨본 놈들의 파트너십
그 난리를 겪고 난 후, 저와 조장 녀석은 예전처럼 형님 동생 하며 살갑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로는 영영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밥을 같이 먹어도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났고, 사적인 대화는 칼같이 끊겼습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현장에서 일할 때만큼은 징그러울 정도로 손발이 단단해졌습니다. 제가 짠 CAM 데이터의 미세한 공차 위험 구간을 조장이 귀신같이 잡아냈고, 조장이 세팅 중에 애를 먹고 있으면 제가 먼저 다가가 공구 회전수와 이송 속도를 슬쩍 수정해 주었습니다. 친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경계심에서 출발한 감시의 눈초리가, 역설적으로 공정 전체의 치명적인 불량을 사전에 틀어막는 가장 독한 안전장치가 되어버린 겁니다. 저 인간이 실수해서 또 내 상여금이 깎이면 안 되고, 내가 삐끗해서 저 인간한테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되니까요. 그건 따뜻한 동료애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조직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물려 내 살점이 뜯겨 나갈 때, 상대방도 똑같이 살점이 뜯겨 나가며 피를 흘려본 자들끼리만 공유하는 서늘한 연대감이었습니다. 헌트의 박평호와 김정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서로를 죽이려 칼을 갈면서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하나의 타깃을 향해 등을 맞댈 수밖에 없었던 건 서로의 절박함과 밑바닥을 너무 적나라하게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벼랑 끝에서 제 살점 같이 뜯겨본 놈들끼리만 통하는 차갑고 질긴 파트너십. 그게 바로 헌트라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제 머릿속에 남은 유일한 판단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TV를 끄니 까만 화면에 피로에 찌든 제 얼굴이 비칩니다. 내일도 아침 일찍 출근해 그 조장 녀석과 마주 보며 기계 돌아가는 소리 속에 묻혀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살갑게 웃어주지는 못하더라도, 내일도 우리는 서로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묵묵히 각자의 치수를 맞춰갈 겁니다.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무게를 지고, 내일도 공장 기계 소음 속으로 출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