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이 열리며 타깃이 등장하고 모든 시선이 꽂히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 압도적인 침묵과 서스펜스를 마주한 곳은 바로 네 명의 영화감독이 자신들만의 색깔로 살인자들의 밤을 빚어낸 한국 앤솔로지 영화 《더 킬러스》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저 어두운 밤에 펼쳐지는 흔한 범죄 영화 중 하나겠거니 생각하며 가볍게 틀었지만, 화면 속에 흐르는 독특하고 서늘한 공기에 압도당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화면에 시선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더 킬러스 오해, '왜 대화만 많지?' 당황하기 쉬운 이유
영화의 전체적인 뼈대는 초등학생 아이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다. 어두운 밤, 낯선 식당이나 낡은 다방 같은 좁은 공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킬러들이 찾아오고, 그곳에서 누군가를 해치우기 위해 타깃을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4개의 짧은 이야기로 나누어 담아냈다.첫 번째 이야기인 〈변신〉에서는 등에 칼이 꽂힌 채 의문의 바로 도망쳐 온 남자와 미스터리한 뱀파이어 바텐더가 마주치며 기괴하고 서늘한 각성이 일어나고, 두 번째 〈업자들〉에서는 수억 원짜리 살인 청부가 하청에 재하청을 거치며 푼돈 30만 원짜리로 쪼그라드는 바람에 어설픈 초보 킬러들이 엉뚱한 타깃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블랙코미디가 펼쳐진다. 세 번째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낡은 선술집과 다방에서 전설의 킬러를 기다리는 인물들의 숨 막히는 심리전이, 마지막 〈무성영화〉는 법과 질서가 사라진 지하 도시의 식당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난투극을 감각적인 무성영화 형식으로 담아낸다. 하지만 '더 킬러스'라는 강렬한 제목만 보고 흔히 떠올리는 마동석 표 통쾌한 주먹 액션이나 할리우드 영화처럼 총을 쏘고 건물이 폭파되는 블록버스터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첫 장면부터 '왜 이렇게 액션은 안 나오고 인물들끼리 대화만 길게 나누지?' 하며 크게 당황하기 쉽다. 나 역시 처음에는 언제쯤 화려한 총격전이 터질까 기다렸지만,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요란한 액션 그 자체가 아니었다. 좁고 폐쇄된 공간 안에서 살인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이 마주 앉았을 때 공기 중에 차갑고 팽팽하게 맴도는 긴장감과 감독들이 정성껏 쌓아 올린 독특한 미장센을 천천히 씹어 삼키는 데 진짜 매력이 있었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숨통을 쥐어짜는 1~2초
네 편의 독창적인 단편들 중에서 내 심장을 가장 강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던 작품은 단연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였다. 1970년대 말의 눅눅하고 낡은 다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에피소드는 공간을 채우는 소리부터가 남달랐다.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 테이블 위에서 식어가는 쌍화차 잔을 조심스럽게 달그락거리는 미세한 마찰음만이 묵직한 침묵 속을 떠돌고 있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지 않아도 저마다 품속에 칼을 숨기고 언제 누구의 목을 겨눌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적막감이 다방 안을 가득 채웠다.바로 그때, 다방 문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며 문이 스르륵 열리고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기다리던 타깃이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문틈으로 바깥의 차가운 밤공기가 밀려 들어오고, 타깃의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다방 바닥을 쿵쿵 울리는 찰나 다방 안에 흩어져 있던 모든 사람들의 날 선 시선이 일제히 한 지점으로 꽂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턱 멈추고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총이나 칼을 휘두르지 않아도 그 정적 속에서 누구 하나가 먼저 움직이면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이 펼쳐질 것만 같은 1~2초의 팽팽한 서스펜스가 내 숨통을 사정없이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능청스럽게 말을 섞으면서도 등 뒤로는 서늘한 살기를 품은 인물들의 팽팽한 신경전을 보면서,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폭탄 없이 오직 배우들의 눈빛과 연출의 호흡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극한의 긴장감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심은경 연기 차력쇼, 〈 무성영화 〉 의 전율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눈부신 보석은 바로 네 편의 영화에 모두 등장해 완전히 다른 인물로 살아 숨 쉰 심은경 배우였다. 네 편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검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는 '이 네 편을 진짜 한 명의 배우가 다 연기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비밀스러운 바텐더부터 어설픈 하청 킬러의 타깃, 짙은 화장을 한 다방 종업원, 그리고 몽환적인 디아스포라 시티의 웨이트리스까지 그야말로 스크린 위에서 펼쳐진 '심은경의 연기 차력쇼'를 직관한 기분이었다.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과 전율을 안겨준 것은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였다. 대사가 쉴 새 없이 오가는 앞선 에피소드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 심은경은 목소리와 말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등장한다.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짙은 흑백의 음영과 실루엣, 그리고 화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빛과 유려한 몸짓 하나만으로 그 넓은 스크린을 꽉 채워버렸다.우리가 흔히 기억하던 밝고 씩씩한 심은경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부수고, 1920년대 고전 무성영화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서늘한 비극과 광기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모습을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배우가 말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렸을 때, 오히려 표정과 몸짓의 디테일이 한계 없이 폭발하며 관객의 가슴을 더 깊고 날카롭게 찌를 수 있다는 엄청난 전율을 경험했다.
비 오는 날 밤, 불 다 끄고 반드시 다시 볼 생각이다. 첫 번째 감상에서는 각기 다른 킬러들의 이야기와 반전을 쫓아가느라 바빴다면, 다음에는 낡은 벽시계 소리와 얼음 잔의 달그락거림, 그리고 심은경의 미세한 눈빛 떨림 같은 화면 속 작은 디테일들을 혼자만의 공간에서 온전히 음미해보고 싶다. 상업 영화의 뻔한 공식에 지쳐 영화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긴장감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이 서늘한 살인자들의 밤으로 발을 들여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