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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란] 핏빛 안갯속 비극과 가장 잔인했던 왕의 민낯

by cow85 2026. 9. 1.

전,란 영화 공식 포스터

 칼싸움 액션인 줄 알고 틀었는데 끝나고 가슴이 묵직하고 서늘하게 저려왔다. 주말 저녁 고단했던 한 주를 마무리하며 집에서 아내와 함께 넷플릭스로 가볍게 즐길 만한 사극 영화를 찾다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전,란》을 재생했다. 시원하고 화려한 검술로 스트레스나 날려보자는 생각으로 캔맥주를 따서 들었는데, 화면 속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내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먹먹해졌다.

 

전,란 후기, 가볍게 틀었다가 가슴이 저려왔다

이 영화의 뼈대는 초등학생 아이에게 들려주어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조선 시대 최고의 무신 집안 외아들인 '종려'와 어린 시절부터 그의 곁을 지키며 검술을 대신 가르쳐주던 몸종 '천영'이 주인공이다.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두 사람은 신분을 뛰어넘어 칼을 맞대며 세상에 둘도 없는 벗으로 자라난다. 하지만 천영은 억울하게 빼앗긴 면천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세상에 분노하고, 때마침 1592년 왜군이 쳐들어오는 거대한 왜란이 터지면서 종려의 집안이 불타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 채 종려는 왕의 곁을 지키는 최측근 무관이 되고, 천영은 푸른 도포를 휘날리며 왜군을 무찌르는 의병의 영웅이 되어 적수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임진왜란 배경에 강동원이 긴 장검을 쥐고 있는 포스터만 보았을 때는 흔히 떠올리는 국뽕 사극 액션 영화인 줄 알았다. 이순신 장군 이야기처럼 조선의 의병들이 쳐들어온 왜놈들을 시원하고 통쾌하게 베어 넘기는 승리의 쾌감을 기대했다가, 가슴이 턱 막히는 씁쓸함과 서늘한 현실감에 뒤통수를 아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점점 명확해진 것은, 이 작품에서 왜군은 그저 거대한 시대적 배경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진짜 날카로운 칼끝은 바다 건너온 외적이 아니라 양반과 노비, 썩어빠진 왕실과 짓밟힌 백성, 즉 조선인과 조선인 사이로 향해 있었다. 신분제라는 가혹한 굴레와 뒤틀린 계급 사회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베어야만 했던 민초들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가슴을 후벼 팠다.

 

안갯속 마지막 장면, 누가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나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자욱한 안갯속 바닷가 결투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깊은 잔상을 남겼다. 짙은 해무 사이로 천영과 종려, 그리고 왜군 장수가 뒤엉켜 서로에게 칼을 꽂아 넣는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는데, 그 안갯속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나는 도대체 누가 이들을 이렇게 서로를 물어뜯는 괴물로 만들었나 싶어 깊고 씁쓸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 함께 대나무 숲에서 목검을 맞추며 웃던 소년들이, 이제는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목숨을 끊어놓지 못해 안달 난 원수가 되어 부딪히는 모습은 어떤 화려한 액션보다도 처절하고 서글펐다. 서로의 속마음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꺼내 보였더라면, 그 잔인한 오해의 싹을 잘라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목구멍을 턱 막히게 했다. 결국 피투성이가 된 채 안갯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무너진 눈빛을 보며, 거대한 시대의 폭력과 신분이라는 벽 앞에서 힘없는 개인의 우정이 얼마나 처참하게 부서져 내릴 수 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전,란 빌런, 생선 발라먹는 왕이 왜군보다 무서웠다

이 영화에서 내 주먹을 가장 꽉 쥐게 만든 진짜 악마는 칼을 든 왜군이 아니라 차승원이 연기한 선조였다. 백성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한양을 버린 채 도망쳐놓고, 전쟁이 잠잠해지자마자 돌아와 굶주린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며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짓겠다고 눈이 뒤집히는 왕의 모습에 분통이 터졌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 바쳐 왜군과 싸운 의병들을 칭찬하기는커녕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까 두려워 역적으로 몰아 잔인하게 고문하고 처형하는 뻔뻔함은 치를 떨게 만들었다. 특히 차승원이 신하들 앞에서 생선을 게걸스럽게 발라먹으며 서늘하게 눈을 부라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소름이 돋았다. 백성들은 흙을 파먹고 굶어 죽어가는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화려한 진미를 입에 쑤셔 넣으면서도 한 치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그 태연하고 오만한 모습에, 아내는 "진짜 전쟁보다 저런 지도자 밑에서 사는 백성들이 천만 배는 더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그 끔찍한 선조의 식사 장면을 보는 순간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맥주 맛까지 씁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내가 맥주캔 탁 내려놓으며 한 번만 제대로 대화했으면 저 지경은 안 갔을 텐데 탄식했다. 왜곡된 세상의 벽과 권력의 횡포 속에서도 결국 서로를 구원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진솔한 대화와 신뢰였음을 알기에, 아내의 그 깊은 탄식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 마음에 오랫동안 묵직한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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