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엔 낄낄 웃었는데 마흔둘에 다시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리모컨을 무심코 돌리다가 케이블 채널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는 영화 러브픽션을 홀린 듯 끝까지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스크린 앞에서 내 지나간 젊은 날의 부끄러운 밑바닥을 강제로 들춰보는 것만 같아 차마 고개를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한때는 그저 남의 연애를 엿보며 키득거리던 유쾌한 코미디였는데, 세월이 훌쩍 지나 마흔둘의 가장이 되어 다시 마주한 그 장면들은 내 서툴고 옹졸했던 과거를 정면으로 비추는 서늘한 거울 그 자체였다.
러브픽션 재관람, 20대엔 낄낄 마흔둘엔 화끈거렸다
영화 <러브픽션>의 줄거리는 누구나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평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본 서른한 살의 무명 소설가 구주월이, 독일 출장길에서 완벽한 매력을 지닌 희진을 만나 첫눈에 반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온갖 로맨틱한 말과 끈질긴 구애 끝에 마침내 연애를 시작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처럼 굴며 그녀의 독특한 비밀까지도 다 품어줄 듯이 행동한다. 하지만 뜨거웠던 불꽃이 잦아들고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관계는 삐걱거린다. 주월은 희진의 지나간 과거와 사소한 말 한마디를 꼬투리 잡아 유치하게 질투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궤변과 옹졸한 집착으로 상대를 지치게 만들며, 결국 스스로 바닥을 드러내고 관계를 망쳐버린다. 20대 후반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하정우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며 "저 사람 진짜 찌질하다" 하고 배를 잡고 웃었다. 그저 유쾌한 코믹 로맨스 영화일 뿐이었다. 그런데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한 사람과 오랜 세월을 함께 부대껴온 마흔둘이 되어 다시 보니, 구주월의 행동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겉으로는 세상 쿨하고 어른스러운 척 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대에게 서운해하고 불안해하며 날을 세우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월의 옹졸함에서 문득 내 젊은 날의 미숙했던 모습이 겹쳐 보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인내와 성숙함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더는 어리석은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먼저 따뜻하게 품어주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양말 한 짝이 들춰낸 내 못난 밑바닥
구주월의 그 지질한 불안과 집착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결혼 생활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던 부끄러운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 퇴근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바닥에 팽개쳐진 양말을 보고 “양말 뒤집어 벗지 말고 바로 빨래통에 넣어줘”라고 가볍게 한마디를 건넸을 때였다. 머리로는 ‘내가 잘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스쳤으면서도, 입 밖으로는 못난 자존심이 먼저 터져 나왔다. “나 오늘 밖에서 하루 종일 기계 돌리고 일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깟 양말 한 짝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몰아세워야겠어?”라며 내 피로를 핑계 삼아 아내를 매섭게 쏘아붙였다. 내 피곤함만 세상에서 제일 무겁고 내 자존심만 소중해서,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챙기느라 똑같이 지쳤을 상대방의 고단함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유치하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 못난 심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내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할 때면 겉으로는 쿨하고 멋진 남편처럼 “재밌게 푹 쉬다 와” 하고 환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지만 막상 혼자 집에 남아 아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속에서 묘하게 뒤틀린 서운함과 질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정작 밤늦게 밝은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아내를 향해 괜히 문을 쾅 닫거나 퉁명스럽게 굴며 ‘너 편하게 노는 동안 나 혼자 집에서 개고생했다’는 티를 팍팍 내던 그 졸렬한 모습. 희진의 과거와 사소한 결점에 쿨한 척 관대한 척 굴다가 뒤에서는 옹졸하게 뒷조사를 하고 비아냥대던 구주월의 그 바닥이 바로 나 자신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내가 양말 하나로 억지를 부리며 날을 세우던 날, 아내는 같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마른 수건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정곡을 찔렀다. “누가 당신 안 힘들대? 양말 하나 바로 넣어달라는 말이, 당신 오늘 하루 고생한 걸 다 부정하는 말로 들려?” 그 차분한 한마디에 머리를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며 내 입은 그 자리에서 딱 붙어버렸다. 내가 밖에서 묻혀온 자격지심과 피로를 가장 편하고 만만한 상대에게 쓰레기처럼 쏟아붓고 있었다는 추악한 진실을 그 짧은 문장 앞에서 완전히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도어록 누르기 전, 피로 외투 터는 연습
아내의 그 차분하고 서늘한 한마디를 겪은 뒤로, 그리고 마흔둘에 러브픽션을 다시 마주하며 내 부끄러운 바닥을 확인한 뒤로 내 행동에는 작지만 단단한 브레이크가 생겼다. 우선 집에서 사소한 일로 욱하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마다 무조건 3초 동안 입을 꾹 닫고 깊게 숨을 고르는 버릇을 들였다. ‘잠깐, 내가 또 내 피로와 유치한 자존심을 방패 삼아 아내를 공격하려는 건 아닌가?’ 하고 내 감정을 한 번 걸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양말이든 설거지든 아내의 지적이 날아오면 구차한 핑계를 대지 않고 “아, 미안해. 내가 깜빡했다” 하며 군말 없이 몸을 움직여 치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퇴근길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의 습관이다. 도어록 번호 키를 누르기 전에 차가운 복도에 잠시 멈춰 서서, 바깥 일터에서 묻혀온 무거운 긴장감과 찌뿌둥한 피로라는 외투를 문밖에서 탈탈 털어버리는 연습을 한다. 내가 밖에서 종일 쇳가루를 마시며 기계를 다루고 도면과 씨름하다 온 만큼, 아내 역시 집에서든 일터에서든 온 힘을 다해 제 몫의 하루를 치열하게 버텨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정하게 된 까닭이다. 일상에서 아내와 사소한 의견 차이로 부딪치려 하거나 마음속에서 속 좁은 옹졸함이 고개를 들 때마다, 스크린 속 구주월의 그 얄밉고 안쓰러운 표정이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등처럼 저절로 깜빡인다. ‘야, 너 지금 또 구주월처럼 굴려고 하지? 폼 잡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라’ 하고 나 자신을 다잡게 되는 것이다.
굳이 다시 보지 않아도 매일 생활 속에서 계속 상영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퇴근길 현관문 앞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바깥의 피로를 털어내고 문을 연다. 내 못난 자존심 대신 다정한 눈빛을 먼저 건네며,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의 하루를 온전히 안아주는 어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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